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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훈회장 인터뷰/ 월간조선 뉴스룸 2021.4월호]100회 맞는 북한 인권 화요집회 이끌어온 김태훈 한변 회장

by 운영자02 posted Apr 23,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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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100회 맞는 북한 인권 화요집회 이끌어온 김태훈 한변 회장

“탈북 선원 北送 결정을 文 대통령이 내렸다면 탄핵 사유”

글 : 하주희  월간조선 기자

 

⊙ 탈북 선원들, 대한민국 국민 아니라고 가정해도 국제인권규범 위반
⊙ 열흘 간격으로 제정된 남한의 대북전단금지법과 북한의 반동사상 문화배격법
⊙ “나는 적진을 향해 달리는 旗手, 끝까지 깃발을 지켜낸다”

金泰勳
1947년생. 서울대 법대 졸업 / 사법시험(15회) 합격 / 前 서울지법 부장판사, 국가인권위원회 북한인권특별위원장, 국무총리 소속 6·25 납북진상규명위원회 위원, 광복 7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 / 現 한반도 인권과 통일을 위한 변호사 모임 회장, 성공적인 통일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성통만사) 이사장
사진=조준우
글쎄, 이분이 이렇게 오랜 시간 한결같이 대북전선(對北前線)을 지킬 줄은 몰랐다. 김태훈 ‘한반도 인권과 통일을 위한 변호사 모임’(한변) 회장 얘기다.
 
  돌아보니 2012년쯤 북한인권 관련 회의장에서 김 회장을 처음 만났다. 듣는 이를 전혀 불편하게 하지 않으면서 본인의 생각을 부드럽고 설득력 있게 전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지만, 많은 북한인권 관련 인사들이 그랬듯 그도 어느 순간 점점 뜸해지지 않을까 싶었다. ‘김씨 3대 부자’와 싸우다 상처만 입었다며 떠나는 북한인권 활동가들을 종종 목격했기 때문이다. 바위에 끝없이 달걀을 던지다 지쳐 나가떨어지는 식이다.
 
 
 

  再월북 권유 민변 변호사 고소
 
  2013년 한변이 창립됐을 때, 비슷한 단체들의 그저 그런 전철을 밟지 않을까 생각한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되지 않았다. 김 회장은 북한 주민의 인권 증진을 외치고, 대한민국 헌법적 가치를 수호하는 한국의 대표적인 법률가 단체로 한변을 키웠다. 8년 동안 각종 불의에 집회와 법적 대응으로 맞서온 결과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법치가 흔들리는 현장들을 찾아가 법적인 대응에 앞장서고 있다. 이제 와선, 이 분이 없었으면 우파는 어떻게 이 정부에 맞섰을까 싶을 정도다.
 
  지난 3월 4일 서울 명동의 법무법인 사무실에서 김 회장을 만났다.
 
  “기분이 항상 좋지 않아요.”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 전날인 3월 3일 한변은 류경식당 매니저였던 허강일씨를 대리해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소속 장 모 변호사를 허위사실 적시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고 발표했다. 그 얘기를 꺼내자 보인 반응이었다. 지난해 허씨는 “장 모 변호사가 2018년부터 류경식당 탈북자들에게 재월북을 권했다”고 증언했다. 그의 말은 이어졌다.
 
  “난 고소·고발한다면 뜯어말리는 사람인데, 안 할 수가 있어야지. 제일 먼저 고발한 게 2017년이에요. 서훈 국정원장. 그때 이미 나라가 절반은 넘어간 거예요. 그 후로 문재인 대통령, 안보실장, 교육부 공무원에 대해 숱하게 고소·고발을 했어요. 할 짓이 아니야, 정상적인 사람이 살 수 없이 이렇게 나라가 망해버렸다니까.”
 
  ― 왜 괴로운가요.
 
  “삼국지에 등갑군(藤甲軍)이라는 게 나와요. 등갑군은 기름을 바른 갑옷을 입어요. 아주 가볍고 튼튼해요. 그런데 제갈량이 불화살을 쏴서 등갑군을 다 태워 죽이잖아. 꼭 내가 그 식이에요. 성경에서도 송사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렇게 고소·고발을 많이 했으니 마음이 편치 않아요.”
 
  ― 허강일씨는 당분간 더 미국에 머물겠지요.
 
  “자꾸 북으로 돌아가라고 하는데… 겁이 나서 한국에 어떻게 있겠어요.”
 
  허씨에게 ‘다시 월북하라’고 권했다는 지목을 받은 민변 장 모 변호사는 아무런 조사나 처벌을 받지 않고 있다.
 
 
  “김정일에게 정치범수용소 문제 제기하라”
 
  김태훈 변호사는 삶의 많은 기간을 북한은 물론 정치 이슈와 별 상관 없이 걸어왔다. 판사로 임관해 주로 민사 재판을 담당했다. 교통사고, 국제상거래 분쟁 같은 재판이었다. 1997년 서울지법 부장판사에서 퇴직해 로펌에 들어갔다. 그러다 2006년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위원에 임명됐다. 이때부터였다. 그가 북한인권운동의 최전선에 서게 된 게 말이다. 그의 말이다.
 
  “2006년에 인권위에 들어갔어요. 인권위원이 11명 있는데 북한인권은 아무도 얘길 안 해요. ‘내정 간섭’이라고도 해요. 제가 보니, 북한인권이 제일 문제인 거 같더라고요. 2006년만 해도, 북한 주민들이 굶어 죽고 있다고 했어요. 헌법을 보면 그들은 당연히 우리 국민 아니냔 말이에요. ‘근데 왜 안 다루지? 당연히 논의해야 되는 거 아닌가?’”
 
  ― 인권위에서 북한인권 문제를 주장하기 시작했군요.
 
  “2007년이 됐어요.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을 한다고 해요. 노 대통령이 인권위를 상당히 존중했어요. 김대중 대통령 시기에 인권위를 만들었으니까요. ‘잘됐다. 노 대통령이 김정일을 만나면 북한 정치범수용소, 이산가족, 납북자 문제를 김정일한테 얘기하라고 국가인권위원회가 권고하도록 하자’고 제안했더니 한명 빼고 다 반대했어요.”
 
  ― 결국 권고안은 통과되지 못했군요.
 
  “지금도 사실 가장 안타까운 게 이때 권고안이 통과되지 않은 거예요. 나만 북한인권을 얘기하니까 안 되는 거예요. 보수정당 몫으로 임명된 위원들을 보고 많이 실망했어요. 민주당 출신 위원들은 대오를 딱딱 맞추는데, 보수 진영 위원들은 안 그래요. 합리적 타협이라면서 결정적인 건 저쪽으로 돌아서더군요. 제대로 된 사람을 뽑아서 보내야지요.”
 
 
  “조국, 처음엔 좋게 봤어”
 

2012년에 국가인권위원회가 발간한 《북한인권침해 사례집》

  ― 이용훈 대법원장 임명으로 ‘법관 쿼터’로 인권위에 들어가신 건데, 목소리를 강하게 내서 임명한 쪽에서 깜짝 놀랐겠어요.
 
  “전 그때까지 성향이 전혀 안 드러났으니까요. 재판도 민사만 맡고, 목소리를 낼 계제가 없었잖아요. 조국 교수와도 처음엔 잘 지냈어요. 하버드 다녀왔다고 하고 얘기도 그럴듯하게 하지, 처음엔 좋게 봤어. 그런데 한두 번 얘기하는데 점점 삐끗삐끗이야. 뭐라고 하는데 맞지도 않아요. 나중엔 보기도 싫더라고.”
 
  ― 가장 보람 있었던 땐 언제였나요.
 
  “2012년에 북한인권 침해사례 기록집을 발간했어요. 2011년에 북한인권 침해 신고센터를 만들어 1년 동안 운영해 사례집을 만든 겁니다. 후속편이 계속 나와야 하는데 그 한 권으로 그만이에요. 그나마 국가기관에서 낸 유일한 침해사례 기록집입니다.”
 
  ― 북한인권 침해사례 기록집의 의미가 있나요.
 
  “그래야 우리가 북한 주민들에게 할 도리를 하는 거예요. 인권침해 예방 효과도 있어요. ‘남한에서 기재를 해두고 있네?’ 겁이 나는 거예요. 독일 잘츠기터(Salzgitter) 중앙기록보존소가 그런 거예요.”
 
  ― 아직 우리는 제대로 운영하지 않고 있잖아요.
 
  “그래서 북한인권법을 고쳐야 한다는 거예요. 북한인권기록센터가 통일부 산하로 되어 있어요. 저는 인권위 산하로 가야 된다고 봅니다. 인권위는 독립기관이에요. 이런 정권이래도 가끔씩 인권위가 목소리를 냅니다. ‘박원순 성희롱 맞다’고 결론 내렸잖아요. 전광훈 목사에게 수갑을 채운 것도 인권침해라고 했어요. 그나마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겁니다. 국제인권규범을 안 따를 수 없거든요.”
 
  ― 독일 잘츠기터 중앙기록보존소는 법무부 산하에 있지 않나요.
 
  “그때(1961년)는 국가인권위가 없었던 시대예요. 국가인권위는 그 후에 생겼어요. 국가인권위가 해야 국제인권규범에 따라 그나마 독립적으로 운영할 수 있어요.”
 
  ― 통일 후에라도 필벌을 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거네요. 인권위가 북한인권을 두고 전향적인 결정을 내린 적은 없나요.
 
  “2010년 12월 북한에 외부 정보를 유입해야 한다고 인권위가 결정했어요. 결정을 이끌어낸 걸 참 보람 있게 생각해요.”
 
 
  지난해 화요집회 재개
 

‘북한인권법 통과 5주년 및 화요집회 100회 기념 세미나’. 3월 2일 국회에서 열렸다.

  그는 인권위 임기를 마친 후 2013년 9월 10일 한변을 설립했다. 이후 이듬해인 2014년 10월부터 ‘화요집회’를 시작했다. 북한인권법 제정을 요구하는 집회다. 매주 화요일 오전 11시30분에 열었다.
 
  “‘올바른 북한인권법을 위한 시민모임’(올인모)이라는 시민단체를 조직했어요. 66개 단체가 모였어요. 한변은 그중 하나입니다. 이들이 매주 모여 북한인권법 제정하라고 촉구했어요. 2016년에 드디어 법이 통과가 됐어요. 그래서 집회를 중지했어요.”
 
  ― 지난해 화요집회를 재개한 이유가 뭔가요.
 
  “북한인권법 집행을 안 하잖아요. 북한인권재단을 출범시키지 않고 있어요. 북한인권재단 이사가 12명이거든요. 그중 2명은 통일부 장관이, 5명은 여당이 임명합니다. 임명을 안 하잖아요. 5년이나 방치하는 것 자체가 범죄예요.”
 
  ― 북한 주민은 우리 국민이니 이들을 보호하는 건 한국 정부의 의무겠네요.
 
  “북한의 인권이 세계에서 가장 열악하잖아요? 대한민국으로서는 헌법 10조에 의해 북한 주민들의 인권을 보호할 의무가 있습니다. 하루이틀이어야지 5년이나 손 놓고 있는 건 북한의 반인도 범죄를 방조하는 겁니다.”
 
  화요집회는 지난 3월 2일 100회를 맞았다. 한변은 이날 화요집회 100회와 북한인권법 통과 5주년을 기념해 국회에서 화상 세미나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100세 철학자’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가 참석했다. 김 교수는 “북한인권 문제는 한반도 내부 문제일 뿐만 아니라 세계 인류 양심의 문제”라면서 “인권 없는 통일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김 교수의 강연을 들으며 큰 위로를 얻었다.
 
  “세계인권선언 전문을 보면 ‘자유·정의·평화’예요. 자유가 먼저 나와요. 자유가 인권이거든요. 그다음이 정의이고, 평화는 그다음입니다. 이 정권은 평화만 얘기해요. 무덤 속의 평화지요. 김형석 교수님이 북한인권 문제는 인류 양심의 문제라고 말씀해주시니 안도감이 들었어요. ‘아… 내가 안 틀렸구나.’”

 

 

  ― 이 정권 들어와 법치가 흔들리는 여러 사건이 있었지요. 가장 문제적인 사건은 뭘로 꼽으시나요.
 
  “많은 사람이 드루킹, 월성 1호기 조기 폐쇄, 울산 선거 부정 이 세 가지를 꼽지요. 전 가장 심각한 사건으로 탈북 선원 북송을 듭니다. 2019년 11월이었죠.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어떻게 자유를 찾아온 젊은이를 눈가리고 포승해서 북한에 넘겨주나요? 용서할 수 없어요.”
 
  ― 입에 물릴 재갈도 준비했다고 하지요.
 
  “우연히 국회에서 취재기자가 문자메시지를 포착해 알려졌잖아요. 안 그랬으면 아무도 모르고 넘어간 겁니다. 이 청년도 판문점 앞에 가서 북한 군인을 보고 턱 주저앉았다는 것이거든요. ‘아이고 내가 북송되는구나’ 하고. 유사 이래 그렇게 잔인한 행위가 또 있겠습니까?”
 
  ― 정의용 외교부 장관은 후보 청문회에서 탈북 선원들을 ‘흉악범’이라 불렀습니다. 범죄 사실은 북한에서 규명할 일이라고도 했고요.
 
  “그런 사람이 어떻게 외교부 장관을 합니까, 헌법 3조도 모릅니까?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예요. 당연히 북한 주민은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정의용 장관, “탈북 선원은 흉악범”
 
  사실 이상한 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 기자는 검역하기 위해 이 선원들이 타고 온 선박을 조사한 현장 검역과장에게 물었다. ‘핏자국을 봤냐’는 질문에, 검역관은 “검역관 여러 명이 들어갔지만 핏자국은 보지 못했다”고 답했다. 정부 주장을 믿는다면 16명이 살해당한 현장인데, 핏자국이 전혀 없었다는 얘기다. 김 회장의 말이 이어졌다.
 
  “정 장관은 탈북 선원 북송 당시 국가안보실장이었어요. 탈북 선원 북송의 실질적인 결정은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했을 겁니다. NSC 의장은 대통령이에요. 그럼 북송시키자는 최종 결정을 누가 했을까요. 문 대통령의 묵시적·명시적 허락이 있었던 거 아닐까요. 이게 안 밝혀져 있어요. 짚고 넘어가야 해요.”
 
  ― 만약 문재인 대통령이 그런 결정을 하는 데 관여되어 있다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건 범죄죠. 탄핵사유고 형사범죄예요.”
 
  ― 정의용 장관 식으로 탈북 선원들을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라고 봐도, 여전히 국제 규약 위반 아닌가요.
 
  “그렇죠. 고문방지협약에 농르풀망(Non-refoulement) 원칙이라는 게 있습니다. 우리 국민이 아니라고 가정해도 보내면 안 됩니다. 국제인권규범에도, 우리 헌법에도 반하는 거죠.”
 
 
  수상한 ‘대북전단금지법’ 제정
 

지난 3월 9일 국회 정문 앞에서 101회 화요집회가 열렸다.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 태영호 의원 등이 참여했다. 사진=조선DB

  ― 사실 탈북자들이 강제 북송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중국에서 잡혀 북송되다 일가족이 자살한 사건도 있고요. 북송이 처음은 아닌데요.
 
  “그런데 그건 중국 얘기거든요. 이건 전혀 달라요. 우리나라 정부가 우리나라 국민을 강제 북송한 겁니다.”
 
  그는 ‘대북전단금지법’에도 의구심을 드러냈다
 
  “2020년 12월 14일 대북전단금지법이 국회에서 통과됐습니다. 그런데 그 열흘 전인 12월 4일 북한에서 새로운 법이 제정됐어요. ‘반동사상 문화배격법’이에요. 대북전단금지법은 남한에서 북한에 정보를 보내면 처벌하는 법이고, 반동사상 문화배격법은 북한 주민이 남한 정보를 보면 처벌하는 법입니다. 북한 주민이 남한 영상물을 보면 사형에 처하거나 교화소에 보냅니다.”
 
  ― 두 법이 한 세트네요.
 
  “그렇죠. 수상해요. 2019년부터 비슷한 행태가 이어졌어요. 탈북 선원 북송한 게 2019년 11월 7일이잖아요? 2019년 11월 25일에 부산에서 ‘2019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가 열렸어요. 문 대통령이 김정은에게 참석해달라고 여러 번 초청 의사를 보였어요. 그걸 위해 탈북 선원들을 제물로 바친 게 아닐까 하는 겁니다.”
 
 
  북한을 국제형사재판소 회부해야
 
  ― 북한인권 문제는 도대체 어떻게 하면 해결의 실마리가 보일까요.
 
  “두 가지예요. 일단 국제사회에 알려야 해요. 유엔(UN) 총회에선 16년 연속, 유엔 인권위에선 18년 연속 북한인권 결의안이 채택되고 있어요. 세계적인 어젠다가 된 겁니다. 더 알려야 해요. 그리고 안보리가 북한의 반인도 범죄를 국제형사재판소에 회부할 수 있게 호소해야 합니다. 유엔 총회에서 임시 법원을 설치할 수도 있어요. 그런 운동을 계속해야지요.”
 
  ― 북한인권운동 중 만난 이 중 누가 가장 인상깊었나요.
 
  “마이클 커비 전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 위원장이요. 그분은 정말 훌륭한 일을 했어요. COI 리포트가 최초로 북한의 인권 침해는 반인도 범죄로, 국제형사재판소에서 반인도 범죄로 처벌돼야 된다고 규명했어요.”
 
  ― 북한 정권에 큰 압박이 됐겠습니다.
 
  “중요합니다. 커비가 그래요. COI 리포트를 한글로 만화처럼 만들어 북한에 보내야 된다고요. 제가 언젠가 형편이 되면 읽기 쉽게 만들어서 북한에 대북전단처럼 뿌리려고 합니다. 북한 주민들이 읽어보고 ‘어, 이게 인권침해네, 국제사회가 이걸 기록하고 있단 말이야?’ 그렇게 느낄 수 있게요.”
 
  국제사회에 북한인권 침해 상황을 알리고 있는 인물로 오토 웜비어의 부모를 빼놓을 수 없다. 돌아오는 6월 20일은 웜비어의 사망 4주기다. 지난 3주기 때 웜비어의 모친 신디 웜비어 씨는 ‘김정은, 김여정 지옥에서 보자(See you in hell)’라는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신디 씨는 2019년 한국을 찾았을 땐 이런 말을 했다.
 
  “북한은 아이를 잘못 골랐다. 나는 죽을 때까지 북한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싸운다.”
 
  김 대표의 신디 씨에 대한 인상은 이렇다.
 
  “대단합니다. 그때 이런 말을 했어요. ‘미국에 의지하지 마라. 책임을 다른 나라에 미루지 마라. 한국 사람들대로 할 수 있는 게 있지 않냐.’ 다시 한 번 용기를 얻었어요. ‘꾸준히 끝까지 하자’고. 지금 그만두면 뭐가 됩니까. 중도 포기는 안 하는 것만 못한 겁니다.”
 
 
  신의주학생운동 기념해야
 

2019년 7월 17일 제헌절에 국회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헌법위반 시정을 위한 청원서 제출 및 발표회’가 열렸다. 왼쪽에서 세 번째가 김태훈 한변 회장. 사진=조선DB

  그는 문득 76년 전 어느 날 신의주에서 일어난 일로 화제를 돌렸다.
 
  “해방이 된 후였어요. 소련군들이 들어와서 물건을 훔치고 부녀자를 강간한 겁니다. 그러자 신의주의 학생들이 소련에 저항해 들고일어났어요. 여러 명이 죽었어요. ‘신의주학생운동’입니다. 그게 해방 꼭 100일 후인 1945년 11월 23일이었어요. 신의주는 국경에 면해 있어요. 문물이 많이 오가는 이유도 있고 해서 학생들이 깨어 있던 거예요.”
 
  ― 그런 일이 있었군요.
 
  “신의주 제일공업학교 박태근 학생의 유해를 그 모친이 품에 안고 서울로 내려왔어요. 남산에 있는 학생 반공의 탑 밑에 그 유해가 모셔져 있습니다. 예전엔 교과서에도 실리고 기념행사도 했다는데, 지금은 없던 일처럼 됐어요. 북한인권법 통과 운동할 때 ‘북한인권의 날’을 좀 만들자고 제안했어요. 무슨 날로 할까 하다 이런 결론을 내렸어요. ‘북한인권의 날은 북한 주민 스스로가 봉기해서 피를 본 날로 하자’고.”
 
  ― 반소(反蘇)·반공(反共) 시위네요.
 
  “세계 최초로 소련 공산권에 항거해서 들고일어난 시위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끝나고 나서 소련이 헝가리, 불가리아, 체코를 점령했잖아요. 그때 다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한반도 신의주에서 유일하게 봉기가 일어난 거예요.”
 
  한변은 이번 정부 들어 북한 문제뿐 아니라 정부 정책에도 목소리를 강하게 내고 있다. 한변은 김명수 대법원장 사퇴를 일찍부터 요구했다. 2018년 12월 12일 변호사 200명의 이름으로 물러나라고 했다. 김 회장은 최근 대법원장 출근 저지 시위에도 참석한다.
 
  ― 전직 법무부 장관이나 검찰총장이 해야 할 일을 대신 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사석에선 현 정부를 강하게 비판하면서도 공개적으로는 목소리를 안 내더군요.
 
  “속이 많이 상합니다. 김명수 퇴진 시위할 때도 전직 법무부 장관, 검찰총장, 대법관… 이런 사람이 목소리를 내야 하는데 가만히 있더군요. 법치가 지금 무너지고 있는데, 나라의 녹을 먹었으면 목소리를 내줘야 되는 거 아니에요? 지금 돈이니 지위니 갖고 있는 사람들, 그래 봤자 나라가 망하면 뭐합니까. 베트남 보트피플 봤잖아요.”
 
 
  김명수 퇴진 운동
 
  ― 김명수 대법원장은 임성근 부산고법 부장판사와 관련해 거짓말한 게 밝혀져 논란이 됐지요. 대법원장과 부장판사가 대화하는데 음성 녹취가 등장한 것도 참 새롭습니다.
 
  “저는 이해가 됩디다. 입을 열었다 하면 거짓말을 하니까요. 춘천지방법원장을 하다 대법원장에 임명됐는데, 첫날 시외버스를 타고 출근했지요? 관용차 타고 오면 누가 뭐라고 합니까? 그런 사람이 취임 후엔 대법원장 관사에 장성한 아들 부부를 들였어요.”
 
  ― 공개적으로 원로 법조인들이 나서야 하지 않나요.
 
  “서명은 해도 공개적으로 한마디 해 달라고 하면 거절해요. 목소리를 내줘야 됩니다. 제가 지금까지 연판장에 서명을 네 번 받았어요. 김명수 대법원장 사퇴 운동 200명, 힘들었어요. ‘대법관 하셨으니까 이름 좀 올려주세요’ 했죠. 조국 사태 때도 법조인 1030명한테 서명을 받았어요. 교수들이 나서는데 법조인들이 가만있으면 창피하잖아요.”
 
  ― 추미애 전 장관 해임 촉구 서명엔 변호사 612명이 참여했지요.
 
  “힘들었어요. 이번 김명수 사퇴 요구엔 385명이 참여했어요. 힘들어도 나는 계속하는데 오히려 서명하는 사람들이 먼저 지치더라고. ‘해봐야 뭐합니까. 고만합시다’, 맥빠지게 이러고 말이야. 꾸준히 해야 해요. 혼자 하는 것보다 수십명, 수백명이 하면 좀 다르잖아. 전쟁 중인데 목소리를 내줘야지.”
 
  ― 한변이 고소·고발한 것 중에 실효적인 결과가 나온 게 있나요.
 
  “최근에 고무적인 결과가 몇 건 나왔어요. 문재인 정부 들어선 후, 교육부 공무원 과장이 국정교과서 집필 책임자던 박용조 진주대 교수의 허락도 안 받고 인장을 변조해서 초등학교 교과서를 수정했잖아요.”
 
  ― 수정한 걸 보니 ‘대한민국은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라는 표현도 빼고,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삭제했더군요.
 
  “직권남용 문서 변조로 고발했는데, 그게 3년 만에 유죄 판결이 났잖아요. 이제 뒤늦게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윤미향 의원 정보공개 청구 소송도 일부 승소 판결이 났어요. 외교부가 항소한다고 해서 끝까지 가게 됐지만요.”
 
  ― 법관들에게 용기가 필요한 시대인 것 같습니다.
 
  “전 용기가 제일 중요하다고 봅니다. 사실 인류의 역사에서 내내 중요했어요. 인격이 높고 지식이 많은 것? 필요하지요. 그러나 결국 불의에 항거하는 용기가 중요합니다. 휘황찬란한 정의를 억지로 세우는 것보다 불의에 눈감지 않고 불의를 없애는 것, 이게 제일 중요해요. 미국 국가 마지막도 이런 말로 끝나요. ‘용기 있는 사람들의 고향.’”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중국에서 체포돼 북송 위기에 처한 탈북자들 구출을 요구하는 집회가 2019년 4월 30일 서울 명동 중국 대사관 인근에서 열렸다. 둘째 줄 왼쪽부터 김태훈 한변 회장, 태영호 전 주영 북한 공사, 림일 탈북 작가.

  ― 가족들은 활동에 찬성합니까.
 
  “가족들은 불만이 너무 많아요. 저에겐 한반도 평화도 중요하지만 가정의 평화가 첫째입니다.”
 
  잘 안 알려져 있지만, 6・25 당시 서울지방법원 판사였던 그의 장인도 전쟁시기 북한에 납북됐다. 이후 생사가 확인되지 않았다. 6・25 당시 납북된 법조인이 187명으로서 전체 법조인 중 판사는 27%, 검사는 14%, 변호사는 40%의 비율로 큰 피해를 입었다. 특히 서울지방법원은 판사 40명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19명이 납치됐다. 법무부를 비롯한 법조계는 이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지난해는 6・25전쟁 70주년이 되는 해였다. 법조계 차원의 추모 행사는 찾아볼 수 없었다.
 
  ― 기업이나 독지가들이 한변에 후원을 좀 하는지요.
 
  “후원을 좀 할 수도 있을 텐데… 말만 하는 것 같아요. 앉아서 욕만 하고 있어요. 행동으로 옮겨줘야지요. 주위 사람들이 제가 퇴임하고 이렇게 살 줄은 몰랐다고 놀라곤 해요. 역시 말보단 행동이에요. 상식이 있는 이들이라면 지금 다들 같은 생각 아닌가요? ‘아, 이건 너무 지나친 거 아니야?’ 이렇게 생각하면 행동으로 옮겨달라는 겁니다.”
 
  한변은 주로 회비로 활동비를 충당하고 있다. 김 회장도 자신의 돈을 쓰면서 활동한다.
 
  “행동이 뭔가요? 조직 아니면 돈 아닙니까. 내가 뛰어주든가, 아니면 행동하는 단체를 후원하면 되잖아요. 자유는 공짜가 아닙니다.”
 
  그는 인터뷰 중 몇 번이나 ‘깃발’이라는 표현을 썼다.
 
  “버티는 게 목적입니다. 전장(戰場)에선 가장 중요한 게 깃발 든 사람, 기수예요. 깃발을 보고 전진하잖아요. ‘아, 우리 부대가 아직 살아 있다’ 그거예요. 깃발 들고 달려가야지, 그거마저 죽으면 부대가 없어져요. 버텨야 해요.”
 
  그러면서 그는 화요집회 동참을 부탁했다.
 
  “위안부 할머니들은 수요집회를 1500여 회 했잖아요. 저도 깃발을 꽂았으니 통일이 될 때까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화요집회를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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